![]() 사람도 동물도 아닌 숫자가 주인공인 다큐를 소개합니다. 2005년 BBC에서 one-off로 방송했던 <The Story of 1>입니다. 가장 쉽고 단순한 숫자 '1'을 중심 인물로 하여 그(?)가 겪은 이야기, 그러니까 수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를 보여주는 내용이죠. 숫자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식으로 사람이 수 개념을 세련되게 다듬었고, 0은 언제 어디서 생겨났고, 숫자와 수학이 끼친 과학적, 실용적, 사회적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등등에 대한 것입니다. 선사 시대 유적부터 시작해서 수메르, 이집트, 로마, 인도, 유럽, 그리고 디지털 시대까지 그 흔적을 짚어 갑니다. 수학 다큐라기보다는 숫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류 문명사, 즉 역사 다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레이터 겸 진행자로 나오는 테리 존스(Terry Jones)는 옛날 몬티 파이썬(Monty Python)이라는 골때리는 영국 코미디 시리즈의 멤버 중 하나이고 영화 배우, 감독, 극작가 등으로도 유명한 분입니다. 올해 만우절에 히트한 BBC의 날아다니는 펭귄 다큐멘터리 동영상에서 남극을 누비며(?)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죠. 아무튼 이 할아버지가 타임머신을 타고 1이 지나온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다니면서 이야기를 풀어놓고 또 특유의 익살을 떱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마을에서 한창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어떤 벌거벗은 남자가 몸에 비누를 묻힌 채로 "유레카!!"를 외치며 카메라 앞을 지나갑니다. 그러면 테리 존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흘끗 보면서 한마디 던지죠. "저 사람이 오늘날 세계최초의 스트리커로 잘 알려진 아르키메데스군요. 아, 그런데 사실은 위대한 수학자이기도(?) 합니다." ![]() 이미 어느정도 익숙할 수도 있는 주제를 보다 재미있게 보여주기 위해, 또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작팀은 '1'을 톡톡 튀는 CG캐릭터로 의인화시켰습니다. 1은 표기의 변천사를 따라 다양하게 변신합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1은 0이나 다른 친구들을 사귀기도 하고 또는 (서로 다른 수 체계 간의 충돌 때문에) 적을 만들어 싸우기도 하는데 이 CG를 보는게 꽤 재미납니다. 이 모델들은 원래 그저 딱딱한 막대기이지만(가끔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구부리기도 함 ^^), 잘 보면 행동의 묘사가 꽤나 실감 납니다. 특히 잘 만들었다고 느낀 부분은 고대 로마 군대에서 decimate하는 장면입니다. decimate는 굴욕을 당한 패잔병 10명당 1명을 죽이는 무자비한 징벌이라네요. 장교가 자기 앞을 지나갈 때마다 로마자 'I' 모양의 숫자 병사들이 자기가 걸릴까봐 움찔 움찔 합니다. 그러다가 한 명을 발로 차서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면 나머지 9명이 놀라서 180도 돌아 절벽 밑을 쳐다보고는 기겁을 하죠. 그중 한명은 뒤로 나자빠져 혼절합니다. (이런걸 움짤로 만들면 재밌겠는데..) 또, 중세 유럽에서 기존 로마 숫자의 아성을 누르고 인도-아라비아 숫자가 보급되기까지의 어려움을 설명하기 위해 불량배들이 '자기 나와바리'를 지나가는 애를 툭툭 때려눕히고 키득키득 놀려 먹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눈코입도 없는 막대기인데도 움직임만으로 감정 표현을 어찌나 그리 잘 하는지.. 나중에는 유머러스하면서 나름 스펙타클한 활극 장면까지 연출됩니다. ![]() ![]() 그러나 <The Story of 1>은 얕은 내용을 메우기 위해 단순히 CG나 우스개로만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닙니다. 농담과 말장난이 내내 이어지지만, 드러내놓고 심각하게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확실히 짚고 있죠. 예를 들면, 다큐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재밌죠? 수메르 설형 문자, 이집트 상형 문자, 인도-아라비아 숫자 등으로 표기가 바뀐 것을 이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번 생각해 보면 이 재치 있는 문장은 수 개념의 '추상성'을 돌려서 말하는 아주 기발한 표현입니다. 먼 옛날부터 시작해서 숫자, 산술, 수학이 발전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순수 수학적 가치라든가 사회적/실용적 목적으로의 이용이라든가 하는 면도 중요합니다만, 사실은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고 개념화/추상화하는 능력을 키워 온 역사'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이런 말도 했죠. "인류가 닭 두 마리와 이틀이라는 전혀 다른 사물이 숫자 2라는 공통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걸 터득하는데 수천년이 걸렸다." 다큐는 이 점을 잊지 않고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사들로 계속 변주됩니다. - 1은 그 모습을 바꾸었다 -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그는 항상 숫자 1이다 - 조각을 일일이 넣을 필요 없이 홈을 파도 마찬가지다 - 계란 대신 쇠공을 이용했고, 나중엔 전류를 이용했다 - 피타고라스 이후 수학자들은 1개의 빵, 1개의 의자 같은 제약에서 벗어나 수 그 자체를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 문명과 저 문명의 표기법이 다르다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인공 1은 항상 같은 사람(?)인데 옷만 갈아입었음을 강조하고 있어요. 수의 추상성(또는 어떤 개념의 추상성)을 설명하기 위해 말하자면 "사물의 속성 중에서 원하는 알짜만 빼내어 독립 개념으로 만들고, 그래서 어떤 구체적 사물이나 instance에 부착시키지 않고도 인식/조작할 수 있다 어쩌구.." 같은 딱딱한 표현을 하나도 안 쓰면서 핵심 아이디어를 자연스럽게 심어줍니다. '변장의 달인'(a master of disguise) 정말 끝내주는 표현이죠? 그 외에도 아주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면서 시청자들이 함께 생각하게끔 자극합니다. 숫자가 없는 삶은 어떨까? 왜 수메르에서 수학이 생겨났을까? 골치 아프게만 보이는 순수 수학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뭘까? 왜 숫자 0은 그렇게 늦게야 발명되었나? 편리한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놔두고 왜 로마 숫자를 그렇게 오래 썼을까? 등등.. 수를 처음 배울 때는 사탕의 개수를 헤아리는 놀이도 하고 한 계단 두 계단에 비유하면서 덧셈을 배우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왜 괄호가 없으면 곱셈을 덧셈보다 먼저 해야 하나 심각하게 혼자 고민하다가 그냥 외워버렸던 아픈 기억이.. ^^) 이 다큐에는 물론 수학적 질문보다는 수학의 역사(..와 역사적 우연)에 대한 질문들이 많습니다. 여하튼 어린이들에게 수가 추상화된 개념이며 이게 지금은 쉽게 보이지만 인류가 그것을 알아내고 세련되게 만들었던 파란만장한 역사가 있었다는걸 가르치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자료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어른들이 보아도 꽤나 흥미로운 지식과 함께 재치 있는 CG와 진행자의 농담을 즐길 수 있을겁니다. 저도 눈 크게 뜨고 정말 재밌게 봤으니까요. 하긴 자막까지 만든 다큐들은 모두 제 맘에 든 것들이기도 하구요. ^^ 동영상 & 한/영 자막 -- BBC.2005.The.Story.of.1.zip <The Story of 1> 스샷 (펼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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