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행 우주'는 요즘 같으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왠지 다들 알고 있는 것 같은 개념입니다. 갖가지 형태로 문학이나 영화에서 변주되었으니까요. 시간 여행이나 대체 역사물, 그밖에도 많은 작품들에서 즐겨 사용되는 plot device이죠. 사실 SF에서는 진부할 정도로 써먹은 아이디어이지만, 이러한 가능성을 진지한 과학 이론으로 처음(1957년) 제시한 사람이 있었으니 휴 에버렛 3세(Hugh Everett III)라는 이론물리학자입니다. 평행 우주는 그가 제안한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에서 도출된 결과물입니다. 대충 말하자면 양자적 랜덤 이벤트(이쪽이냐 저쪽이냐)가 일어날 때마다 온 우주가 이쪽이 발생한 우주와 저쪽이 발생한 우주로 분기되어, 결국 끝없이 많은 우주들을 만들어낸다는 이론입니다. 원래는 우주가 마구 만들어지는 그런 아이디어가 시작이 아니라, 악명 높은 measurement problem의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관측 행위에 대한 특별한 가정을 빼버리고 수학적으로 일관되게 기술하면 어떤 귀결이 나오는지를 검토하다가 얻어낸 결론이라고 합니다. ![]() 휴 에버렛은 지도교수가 추천서에서 "이런 학생은 평생 단 한 명 만나볼 정도" 라고 극찬했던 천재였고, 앞서 말한 혁명적인 이론을 스물넷에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시대를 너무 앞서가서인지 다들 이 무명의 젊은이가 정신나간 공상을 했다며 거의 '듣보잡'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 물리학계의 거장인 닐스 보어가 주장했던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주류인, 코펜하겐 해석이 대세였죠.(지금은 다세계 해석이 바로 뒤를 잇는다고 하네요..) 이 연구가 한참 뒤에나 재발견되어 스타가 되었는가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휴 에버렛이 집에서 죽어 있는 것을 아들이 발견했는데, 그가 마크 올리버 에버렛(Mark Oliver Everett)입니다. 혹시 EELS를 아시나요? 슈렉 1~3편의 OST에도 참여했고(예를 들면 My Beloved Monster), 예전에 멜론에 헤드폰 꽂고 음악 듣던 우리나라 광고의 배경음악(I Need Some Sleep)으로도 알려진 락밴드입니다. 본명보다 'E'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마크는 여기서 싱어송라이터, 키보드, 기타, 드럼까지 맡고 있는.. 거의 원맨밴드네요. (객원 멤버들은 수시로 교체되는 프로젝트 그룹입니다) ![]() 하지만 그의 사춘기와 젊은 시절은 가족의 불행한 역사로 점철되었습니다.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하던 누나가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하던 날 우연히 발견해서 응급실로 데려간 것도 마크였고, 바로 한 달 뒤 아버지의 싸늘한 주검을 눈앞에서 보았죠. 몇년 뒤에는 누나가 "아버지가 계신 평행 우주로 떠난다"는 유서를 쓴 뒤 자살했고, 그 2년 뒤에 어머니가 암으로 죽었습니다. 게다가 다큐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무렵에 그의 친구들도 몇 명 죽었다고 합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할 나이에 느닷없이 세상에서 외톨이가 된 것이죠.(사촌 중 한 명은 나중에 9.11 테러 때 펜타곤에 충돌한 여객기의 승무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서로 죽고 못 사는 단란한 가족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제목 <Parallel Worlds, Parallel Lives>이 말해 주듯이, 평행 우주 이론을 만든 과학자와 그 아들은 한 집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평행 우주에서 남남처럼 살아가는 평행선 위의 두 삶이었습니다. 휴 에버렛은 타고난 천재성을 온전히 쏟아서 인류에 크게 이바지할지언정, 가정을 이루고 좋은 가장이 될 인물은 아니었던 듯.. 마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저 말이 없고 늘 같은 자리에 처박혀서 외계어 같은 문자로 계산이나 하는 모습뿐, "집 안의 가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가족 전체가 그렇게 썰렁하고 따로 노는 집안이었을까요? 최소한 따스하고 정겨운 집은 절대 아니었던 것 같죠.. ![]() 그의 노래들을 들어 보면 그런 삶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 납니다. EELS의 음악은 뭐라고 규정짓기 힘들 만큼 스타일이 독특하고 무척 다양한데.. 들으면서 제가 많이 느꼈던 정서는 쓸쓸함, 광기, 짓궂은 농담,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은 안타까움, 그래도 살아간다는 담담함.. 이런 감정들이랄까요. 또 그런 노래들의 가사는 예외 없이 자신의 삶, 누나, 또는 가족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담고 있더군요. 저는 이리저리 찾아 듣다 유독 Electro-Shock Blues라는 곡에 꽂혔는데, 알고 보니 누나의 유서를 가사로 쓴 것이라고 합니다. 꽤나 우울하지만, 우울할 때 들어도 의외로 괜찮은 곡입니다. (한층 더 처절하고 불안정한 느낌으로 누나의 자살을 다룬 Elisabeth on the Bathroom Floor라는 곡도 있습니다.)마크는 이렇게 외롭고 상처 입은 마음을 노래 가사로 달랬습니다. 한 인터뷰에서는 음악이 아니었던들 자기는 이미 누나의 뒤를 따랐을 거라고도 했더군요. 그래도 직접 사생활을 밝히는 것은 무척이나 꺼려 왔지만,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의받고 한번쯤 가족에 대해 다시 정리하고 생각해 보려고, 또 그런 천재적인 아버지의 이론이 왜 외면받았는지 이해하고 싶어 나섰습니다. 그렇게 이 다큐는 시작합니다. (설정은 <My Architect: A Son's Journey>(나의 아버지, 건축가 루이스 칸)와 비슷하지만, 그것보다는 더 유머러스하고, 'weird'합니다.) ![]() 마크는 아버지 휴 에버렛의 옛 친구들, 함께 일했던 학자들, 대학 동창 등등을 만나서 그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수학적 재능을 전혀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에("음식점에서 팁 계산도 어려워하는 정도") 깡통 수준에서 시작해 물리학과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들을 아버지의 친구 & 후학들로부터 배웁니다. 중간 중간 귀여운 애니메이션이 나와서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네요. 그리고 아버지의 기념비적인 논문 원본을 기록 보관소에서 찾아 읽어보고는 말합니다. "이 첫 문장을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되다니, 놀랍습니다."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쫓고, 몇년간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집안의 이런저런 유품, 잡동사니들을 다시 들춰 보지요. 이렇게 마크가 자신의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카메라는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주제에 대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듯 하다가, 물리학 강의가 나오더니 닐스 보어, 에르빈 슈뢰딩거 같은 이름들이 등장하다가, 또 천재의 개인사와 그 아들의 소회가 이어집니다. 굉장히 중구난방이 될만도 한데, 이것들이 아주 훌륭하게("훌륭하게"에 큰따옴표) 연결되어서 뭐랄까 정말 독특한 감상을 자아내는군요. 물리학 이론, 아버지의 삶, 마크의 여행, 이런 세 줄기를 절묘하게 엮는데는 EELS의 좋은 음악이 한 몫을 합니다. 이미 있는 노래를 가져다 쓴 것인데도 가사가 줄거리에 딱딱 맞아떨어지구요. 이상할 것도 없는게, 애초에 자신의 삶과 가족 이야기에서 나온 노래이니까요. 맨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제 해석을 곁들여 보면.. 마크는 "아버지는 물리학이라는 세상의 락스타였구나" 하고 말합니다. 그 자신은 음악계의 락스타이고, 자신의 아버지는 또다른 세계인 물리학의 락스타.. 그러나 서로 아무런 교감이 없었던 두 평행 우주 속의 평행 인생들이었지만, 어쩌면 이 父子는 양쪽 세상에서 모두 '락스타'가 된, 평행 우주에 걸친 한 명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잘 보면, 오프닝 화면에서 땅으로 떨어지던 뉴턴의 사과가 엔딩 화면에서는 반대로 하늘로 올라가는데(중력이 척력으로 작용하는(?) 평행 우주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 애니메이션도 그것을 상징하는 조크가 아니었나 싶군요. ![]() (색조도 다르죠..) p.s. #1 더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한 링크(이 글 쓰는데도 참고했습니다) : - 다큐에도 나오는 전기 작가 Peter Byrne이 SciAm에 기고한 에버렛의 이론과 삶에 대한 글. (추천) - 이 다큐멘터리 관련해서 마크 에버렛의 최근 인터뷰. - 역사학자가 연대순으로 정리한 휴 에버렛의 일생. (매우 자세한 뒷얘기들) 이상을 읽어 본 느낀 점만 써도 또 한바닥 될 것 같아서 세줄 요약 -_-;; (1) 에버렛의 지도 교수 존 휠러(John A. Wheeler)는 참 훌륭한 스승이었던 것 같다. (2) 에버렛네는 다큐멘터리에서 그나마 센티멘탈하게 표현한 것보다도 더 메마른 가족이었던 것 같다. (3) 마크의 성장 환경을 보면 이렇게 이겨내고 또 성공한 사람이란게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 p.s. #2 이 프로그램은 지난 3월에 Royal Television Society Awards에서 과학/자연사 프로그램 부문을 수상했고, 지난달 영국의 아카데미 상 격인 BAFTA awards에서 TV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외국 사이트 돌아다니다 보니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호평이 자자하더군요. 저에게도 올해 본 가장 마음에 든 영상물 중 하나입니다. ![]() 동영상 & 한/영 자막 -- BBC.Parallel.Worlds.Parallel.Lives.2007.zip <Parallel Worlds, Parallel Lives> 스샷 (펼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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