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Fermat's Last Theorem - BBC Horizon
Horizon 시리즈 중에 <Fermat's Last Theorem> 자막을 요청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대본이나 영어 자막이 웹에 이미 돌아다녀서 금방 끝났네요. 자막을 만드는 중에는 같은 내용을 여러번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영화를 두세 번 볼 때 감상이 다르듯이, 이 다큐도 오랜만에 다시 보니 새롭게 보이는군요. 기념으로 짧게 몇 자만 적어 보겠습니다. (정말 놀라운 감동을 얻었지만, 웹페이지의 여백이 좁아 모두 적을 수가 없군요. ^^)

동영상 & 한/영 자막 -- BBC.Horizon.1996.Fermats.Last.Theorem.zip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역사와 일화는 워낙 유명하여 새삼 얘기할 것은 없습니다. 서울대 김명환 교수의 글이 한국어로 된 비전문가를 위한 소개로 가장 괜찮은듯 하군요. 책은 사이먼 싱(Simon Singh)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가 단연 최고입니다. 읽는데 수학 지식도 필요 없고, 아주 아주 재미있으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수학 과학 교양서를 통틀어 다섯 권만 뽑으라면 꼭 넣겠습니다.


이 Horizon 에피소드도 사이먼 싱이 director를 맡았습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책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물론 책이 훨씬 자세하지요. 수백 년의 역사를 거쳐 Andrew Wiles까지 이르는 수학사의 대장정도 다큐에는 나오지 않으니까요. 둘 중 하나만 볼거라면 당연히 책 쪽입니다. 그리고 둘 다 볼거라면, 다큐를 먼저 보고 책을 보는 것이 더 나을 듯 합니다.

대신 다큐에서는 '바로 그 주인공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은 제외하고요.. 주인공'들'이라고 한 것은 FLT의 증명이 Wiles 뿐만 아니라 동시대 최고 수학자들의 합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다큐에는 수학의 대가들이 우루루 몸소 출연합니다. 그나마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John Horton Conway일 듯 하고(아마 game of life이나 몇권의 책 때문일듯), Goro Shimura, Barry Mazur, Ken Ribet, Nicholas Katz, Peter Sarnak 등의 인터뷰가 나오죠.(사실 저도 전에는 앞의 두 명 밖에는 몰랐지만..)

옛날에 책을 읽은 기억 때문인지 다큐를 처음 보았을 때는 FLT 증명의 극적인 역사를 따라가는 감동의 드라마였는데.. 두어번 보니까 의외로 유머가 눈에 띄더군요. 그리고 각 학자들의 성격이 조금씩 대비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타원 곡선은 이상하게도 타원도 아니고, 곡선도 아니다" 라는 나레이션이 나오고, '뭐.. 뭐야?' 하는 시청자들을 향해 Barry Mazur가 "처음 들어봤겠지만 아무튼 무지 중요한 겁니다" 이렇게 강조합니다. 바로 다음 장면은, 앞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 Conway가 이번에는 난감한 목소리로 아래와 같이 얼버무리다가 끝납니다.(물론 Conway가 얼버무렸다기보다는 편집을 이렇게 한 것입니다) '난해한 수학을 layman에게 어찌 설명할런지 초난감해 하는 수학자' 의 전형이죠.


(연구실은 기하학적인 장식물들로 가득하고, 입고 있는 셔츠 디자인도 이제 보니까 M. C. Escher의 타일링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조금 뒤에는 타니야마-시무라 추측을 설명할 차례가 되는데,


"왜 자꾸 나만 시켜 ㅠ_ㅠ" 하는 난감한 표정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Conway에게만 부탁한게 아닙니다. 등장하는 수학자들이 다 한번씩 OTL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데.. 모듈러 형식의 설명을 부탁 받은 Peter Sarnak은, "그저 웃지요".


(다큐만 봐서는) 좀더 진지한 성격인 듯 한 Nick Katz는 그나마 현실적인 변명(?)을 합니다. 비밀리에 진행된 Wiles의 연구를 도와주고, 첫번째 증명의 중요한 결점을 지적해 준 인물입니다.


도저히 '한 문장'으로는 설명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수학의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을 재미있게 풀기가 참 어려운데, 이 초난감해 하는 수학자들을 연거푸 보여줌으로 해서 오히려 이런 난감함이 농담이 되는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이런 효과를 주려고 일부러 넣은게 아닌가 싶군요.

이럴 때마다 Barry Mazur가 등장해 부드러운 말투로 설명을 시작하죠. Mazur는 이 다큐에 등장하는 난해한 수학 개념들을 영리한 비유를 이용하여 설명해주는 '선생님' 캐릭터 역할을 잘 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드라마 캐스팅이라도 한 것 같군요. ^^


한편, 뒷부분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에 부쳤던 Wiles의 강연에 "무언가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해프닝이 소개됩니다. 학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도는데 출처는 잘 모르겠더라는 Ribet의 사건 진술(?)이 나오죠. 그런데 Wiles의 비밀을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은 위에서 말한 Katz와 Sarnak 이렇게 단 두명입니다. Katz가 아니라면, 귀류법에 의해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Sarnak.. ^^ 하지만 그 다음 장면에서 Sarnak은 연루 의혹(?)을 강하게 부인합니다. (다큐만 봐서는) Ribet이나 Sarnak은 왠지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일 것 같더군요. 제작자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잠깐 잠깐 등장하는 수학자들 각각의 캐릭터가 나름대로 잘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방을 먹이는 Conway의 목격 증언(?). 학계의 뉴스들에 대해, 진짜 대박이 한 건 터질텐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Sarnak이 말했다는 ..


그제야 슬며시 웃으며 의혹을 일부 시인(?)하는 Sarnak.. 물론 심각한 문제는 전혀 아니었고, 발랄한 음악과 함께 경쾌한 템포로 지나갑니다. 이 부분의 편집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교차 편집을 통해, 마치 Conway의 고자질 때문에 Sarnak의 오리발이 실패했다는 식으로 보여줍니다. ^^


이 다큐에서 제가 꼽는 명언들 중 하나는 시무라 고로의 인터뷰입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을텐데도 영어는 많이 서툴러 보입니다..만, 몇마디 안되는 말들이 인상적입니다. 오렌지오랑지라고 발음하지 않을까 싶은 이 어눌한(?) 어르신 또한 수학에 큰 획을 그은 대가입니다. 영어 몰빵 교육을 해야 한다는 모모씨에게 보여주고 싶군요. ^^

아래는 자신의 친구 타니야마 유타카(Yutaka Taniyama)를 추억하는 대목입니다. 아마 타니야마는 엄밀하고 계획적인 증명보다는 직관에 의존한 수학자였나 봅니다. 실수는 많았지만 아이디어가 뛰어났던 친구처럼, 자기도 '좋은 실수'들을 많이 하는 것을 배우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제안했던 '타니야마-시무라의 추측'이 20년만에 Wiles에 의해 증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가 처음 했다는 말이 걸작입니다. 물론 농담이겠지요.


캐릭터로 말하자면 순진하고 착한 순딩이 쯤 될 주인공 Andrew Wiles를 빼놓을 수 없죠. 말도 조용 조용하게 하지만, 그러나 (Ribet의 표현을 빌자면) '지구상에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공략하겠다고 시도할 만큼의 배짱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 입니다.


지식만 늘어놓거나 시간순으로 단조롭게 따라가는 식의 프로그램은 '재미' 면에서는 지루할 수 있습니다만.. 이 다큐는 플롯이 잘 짜여진 드라마처럼 장면의 선후 관계가 자연스럽게 구성되어 흥미진진합니다. 화려한 비주얼도 전혀 없는 수학 다큐멘터리이지만 참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강추 에피소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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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oydon | 2008/02/14 00:35 | Documentaries | 트랙백(1)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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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나만의 정보창고 at 2008/09/04 12:38

제목 : Horizon - Fermat`s Last Theo..
방송 : 1996. 01. 15, BBC 4Rip by UNKNOWN번역 : 디핑(http://croydon.egloos.com/60834) 17세기 프랑스의 아마추어 수학자 페르마가 여백에 해두었던 낙서는 최근 300년 간 수학계의......more

Commented by 가고일 at 2008/02/14 11:01
몇달 전에야 겨우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수학은 못해도 교양수학도서는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 쪽으로는 꽤 읽어왔었는데
이건 확실히 '증명의 키'란 부분을 정통으로 꿰뚫고 있더군요. 몰라도 감은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와일스가 카츠와의 공동연구를 위해 한학기동안 위장강의를 개설해서
증명의 핵심부분을 가르쳐 나가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Commented by croydon at 2008/02/14 23:39
가고일//
책이 명작이죠.. 수학자나 일화를 대충 모은 책들이야 흔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수학적 증명이나 사고방식을 이 책처럼 잘 풀어 쓴 것도 드문것 같습니다.
공동 연구를 위해서 기꺼이 오랜시간을 투자한 카츠도 참 멋지죠?
Commented by 동물원 at 2008/04/07 03:14
(솔직히 제 전공이 통계학이다 보니) 수학 교양서적이나 교양다큐라고 해봐야 절대로 '교양'으로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 책은 아주 잘 쓰여진 '교양서적'이라는 데 동감합니다. ^^ 워낙 익숙한 부분이고 해서 디핑님이 닥갤에 이 다큐를 소개하실 때 그냥 흘려보고 말았는데 사이먼 싱이 해설을 맡은 줄은 몰랐네요. 수학자들의 공동연구는 사회과학분야와는 달리 옳고 그름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한 분야이다 보니 뜬구름잡는 소모적 논쟁없이 좀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croydon at 2008/04/08 01:18
동물원//
아 그러셨군요.. ^^;; 자연과학만 하더라도 사이먼 싱이 쓴 <빅뱅>에 보면 대립하는 우주론의 지지자들끼리 장내/장외에서 치열하게 아주 유치할 정도로 싸우는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재미있었던게(불 구경 -.-) 기억납니다. 수학이 그나마 그런 면에서는 깔끔하겠죠.
Commented at 2008/05/24 00: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5/30 00:5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croydon at 2008/05/31 16:22
의무감에 댓글 다는건 아니니까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

저 멀리 있는 목표를 두고 직감으로 결론을 내놓고 입증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죠. 수학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요. 인간의 사고 과정이 원래 그런거니까요.

사 실 conjecture만 해도 확증이 아닌 추측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자연과학에서 종종 나오는 postulate는 말 그대로 가정입니다. 사실은 수학에서 말하는 공리(axiom)만 해도 학교 다닐 때는 "증명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명한 진리"라고 배우지만 그건 다소 절대적인 관점이고, 실제로는 논의의 틀을 짜는 '가정'이죠.

m 구조니 뭐니 하는게 뭔지는 저도 전혀 모릅니다. ^^ 그래도 Galois representation이 뭔지 같은건 몰라도 논리적 관계만 이해하면 되게끔 잘 만들어져 있죠.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읽고 나면 수학적 지식은 거의 늘지 않지만, 내용은 잘 이해가 되고 수학적 아이디어와 방법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Commented at 2008/06/01 10: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croydon at 2008/06/01 21:53
갤에 올려서 여러명이 같이 읽어도 좋을만한 이야기들이네요. 책을 읽으시면 좀더 와닿는 느낌을 가지실 수 있을거예요. 읽으시고 언제 한번 갤에 독후감이라도..? ^^
그리고, 이 링크도 한번 살펴보세요.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cience&no=226082
Commented at 2008/06/08 17: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봄날은간다 at 2008/09/04 12:07
아 놔.....디핑훃 때문에 책 질렀어요...ㅋㅋ 앞으로도 좋은 책 추천 많이 해주시길. 사실 이제서야 방금 이 다큐 봤거든요.
Commented by croydon at 2008/09/06 01:19
이 책 절대 후회 안하실거예요.. 수학 영 싫어하던 사람에게 빌려줬는데도 아주 좋다고 하더라구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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